글 쩐 꾸옥 황 인턴기자
해가 지면 하노이 구시가지 한복판의 짧은 골목이 환하게 깨어난다. 길이 266m 남짓한 따히엔 거리는 맥주잔을 부딪치는 외국인 여행객과 현지 젊은이들로 밤마다 발 디딜 틈이 없다. 이 흥겨운 거리의 이름이 프랑스에 맞서 싸운 한 무관(武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거리 이름으로 배우는 베트남 역사] 맥주 골목에 이름을 남긴 항불 무관, 따히엔(Tạ Hiện)](https://i0.wp.com/hanoikoreannews.com/wp-content/uploads/2026/11/street-history-ta-hien-2026-11-2.jpg?resize=532%2C348&ssl=1)
붓 대신 칼을 든 무관 – 따히엔의 생애
따히엔(Tạ Hiện, 謝現, 1841~1887)은 따꽝히엔(Tạ Quang Hiện)이라고도 불리며, 타이빈(Thái Bình)성 투이아인(Thụy Anh)현 꽝랑(Quang Lang) 마을(현 흥옌성) 출신이다. 열여덟 살에 군에 들어가 무과에 급제한 뒤 응우옌 왕조의 무관으로 승진을 거듭했고, 1882년 황기군(Cờ Vàng) 수장 호앙숭아인(Hoàng Sùng Anh)의 무리를 평정한 공으로 제독(提督)에 올랐다. ‘데히엔(Đề Hiện)’이라는 별칭은 여기서 나왔다.
1883년 프랑스가 박끼(Bắc Kỳ, 베트남 북부)를 재침공해 남딘성이 함락되자, 따히엔은 고향에서 의병을 모아 성을 되찾겠다고 조정에 청해 남딘·흥옌 제독에 임명되었다. 그해 6월 수천 명의 의병을 네 갈래로 나누어 남딘성을 공격했고, 성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프랑스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조정이 프랑스의 압력에 밀려 의병 해산을 명하고 굴욕적인 조약을 받아들이자, 그해 12월 관인(官印)을 반납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근왕운동과 항불 투쟁 – 끝나지 않은 싸움
관직을 내려놓은 따히엔은 오히려 더 자유롭게 움직였다. 바이서이(Bãi Sậy) 봉기의 지도자 응우옌티엔투엇(Nguyễn Thiện Thuật) 등과 손잡고 북부 각지의 항불 세력을 엮었고, 1884년에는 랑선까지 올라가 프랑스군과 맞섰다.
1885년 7월 함응이(Hàm Nghi) 황제가 근왕(勤王) 격문을 내리자, 따히엔은 박끼 군무 도통(都統) 겸 남딘·흥옌 제독에 임명되어 북부 근왕운동의 한 축을 맡았다. 호랑이와 표범을 뜻하는 별명으로 불린 세 아들 까호(Cả Hổ), 하이훔(Hai Hùm), 바베오(Ba Beo)도 지역을 나누어 항전을 이끌었다.
프랑스군은 1885년 말부터 1887년 초까지 타이빈의 근거지를 잇달아 소탕했다. 이 거센 공세 속에서도 무장 투쟁을 멈추지 않았던 따히엔은 결국 프랑스군에 생포되어 처형당하며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정확한 사망 시기에 대해서는 1887년이라는 설과 1892년 혹은 1893년이라는 기록이 엇갈린다. 이어 1888년 함응이 황제마저 붙잡히면서 북부 지역의 근왕운동은 차츰 잦아들었다.
따히엔은 오늘날 타이빈·남딘 지역 근왕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항불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비록 그는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으나, 그의 손자 따꾸옥루엇(Tạ Quốc Luật, 1925~1985)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돌격조를 이끌고 프랑스군 사령관 드 카스트리(Christian de Castries) 장군을 생포했다. 할아버지가 시작한 싸움이 손자 대에 이르러 마침표를 찍은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