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에세이] 1,500년 된 거짓말, 아직도 교과서에 있다 –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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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 양국의 역사학자들이 50년간 공동 연구한 끝에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도 일본의 일부 역사교과서에는 여전히 살아남아 다음 세대에게 전달되고 있다. 도대체 왜일까.

자료출처: 이희근 지음 〈한국사는 없다〉외 관련 논문 참조 / 글 강희엽(한인소식 편집위원장)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중국 지린성 집안(集安). 414년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높이 6.39m의 거대한 비석으로, 임나일본부설 논쟁의 핵심 사료 중 하나다. 비문에 새겨진 ‘신묘년 기사’를 둘러싸고 한일 양국 학자들 사이에 100년 넘게 해석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중국 지린성 집안(集安). 414년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높이 6.39m의 거대한 비석으로, 임나일본부설 논쟁의 핵심 사료 중 하나다. 비문에 새겨진 ‘신묘년 기사’를 둘러싸고 한일 양국 학자들 사이에 100년 넘게 해석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일본은 왜 〈임나일본부〉에 집착할까?

〈임나일본부설〉은 한국과 일본 양국이 50년간 공동 연구한 결과, 사실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 학설이다. 그럼에도 일본의 일부 중학교 역사교과서에는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출병하여 임나라는 곳에 거점을 두었다’, ‘고구려는 백제와 임나를 기반으로 하는 일본군의 저항에 의해’, ‘임나에서 물러나 한반도 정책에 실패한 야마토 조정’ 등의 표현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는 마땅히 고쳐져야 할 내용이다.

이 글은 전 세계로부터 역사 왜곡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일본 후쇼샤판 중학교 역사교과서에 대해, 우리 정부가 공식적으로 수정을 요구한 내용 중 첫 번째로 등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을 다루고 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일본 학계에서도 임나일본부설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인정하면서도, ‘어떤 형태로든 가야(伽耶)는 왜(倭)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며, 4~5세기경 왜가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싸웠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교과서에 임나일본부라는 표현을 직접 쓰지 않고 ‘거점을 둔 것으로 여겨진다’는 식으로 단정을 피했으니 오류가 아니라고 버티고 있다.

일본 학계 내부에서도 1970년대 이후 이 학설을 다시 검토하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오랫동안 정설처럼 받아들여져 왔지만, 1960년대 이후 우리 학계가 꾸준히 반론을 제기하면서 비판과 수정이 이어졌고, 지금은 학설로서의 생명력을 거의 잃은 상태다.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려면 역사가 필요했다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에도시대(江戶時代)부터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일본이 고대에 조선을 지배했다’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 서구 열강의 압박에 맞서기 위한 돌파구로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면서 이 주장은 더욱 힘을 얻기 시작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근대화에 필요한 인력과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한국을 식민지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정한론이었고, 그 역사적 근거로 내세운 것이 바로 임나일본부였다. 임나일본부설은 결국 일제의 한반도 강점을 ‘역사적으로 당연한 일’처럼 포장하는 논리로 작동했고, 오늘날까지도 일본 역사교과서에 버젓이 살아남아 있다. 직접 지배했다는 주장이든,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핵심은 같다.

칠지도(七枝刀). 4세기 백제가 제작하여 왜왕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진 철제 칼로, 칼날 양쪽에 가지 모양의 돌기가 3개씩 달려 있어 독특한 형태를 지닌다. 쓰에마쓰는 이를 ‘백제가 왜의 지배를 인정하며 바친 것’이라고 해석하여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았으나, 대다수 학자들은 백제가 왜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일본 나라현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이 소장하고 있으며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사진 출처: 연합뉴스)
칠지도(七枝刀). 4세기 백제가 제작하여 왜왕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진 철제 칼로, 칼날 양쪽에 가지 모양의 돌기가 3개씩 달려 있어 독특한 형태를 지닌다. 쓰에마쓰는 이를 ‘백제가 왜의 지배를 인정하며 바친 것’이라고 해석하여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았으나, 대다수 학자들은 백제가 왜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일본 나라현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이 소장하고 있으며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사진 출처: 연합뉴스)

한 역사가가 만들어낸 ‘제국의 논리’

임나일본부설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한 인물은 일본 역사가 쓰에마쓰(末松保和)였다. 1933년부터 일한(日韓) 관계를 연구하던 그는 1949년 〈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를 펴내며 이 학설을 집대성했다.

그가 가장 먼저 내세운 근거는 8세기 초에 편찬된 〈일본서기〉였다. 〈일본서기〉 진쿠황후 49년 조(369년) 기록을 보면, 진쿠황후가 보낸 장수들이 백제 군사와 함께 신라를 공격하여 창녕·김해·함안·남해 등 가야 지역 7개 나라를 평정했다고 되어 있다. 당시 왜가 경상도 대부분을 장악하고 전라도와 충남 일부까지 귀속시켰으며, 남부 지역 임나에 일본부를 설치하여 직접 지배를 시작했고, 562년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할 때까지 백제와 신라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근거로는 〈광개토대왕비문〉을 내세웠다. 비문의 한 구절을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 임나(가라),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당시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했다. 당대의 사실을 기록한 1차 사료이고 고구려 측에서 작성한 자료라는 점에서 〈일본서기〉보다 신뢰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세 번째로는 중국 송나라 역사서 〈송서(宋書)〉의 왜왕 책봉 기록을 근거로 삼았다. 왜왕이 중국에 신라·임나·가라 등지에 대한 지배권을 공식 인정해 달라고 요청했고, 송나라와 양나라가 이를 일부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소장된 칠지도(七枝刀)까지 동원했다. 칠지도는 백제가 왜의 군사적 우세를 인정하여 야마토 조정에 바친 것이라고 해석함으로써 임나일본부를 정당화하려 했다.

쓰에마쓰 야스카즈의 〈임나흥망사〉(1949). 일본의 식민사학자 쓰에마쓰 야스카즈가 패전 이후 임나일본부설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하여 펴낸 책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임나의 강역을 경상도뿐만 아니라 전라도, 충청도 일대까지 무리하게 확장시키며 일제 식민사학의 논리를 고수했다.
쓰에마쓰 야스카즈의 〈임나흥망사〉(1949). 일본의 식민사학자 쓰에마쓰 야스카즈가 패전 이후 임나일본부설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하여 펴낸 책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임나의 강역을 경상도뿐만 아니라 전라도, 충청도 일대까지 무리하게 확장시키며 일제 식민사학의 논리를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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